기사 작성일 :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오후 3시 14분

[정문섭의 중국이야기] 중국의 신화전설시대

정문섭 박사
전 주중 한국대사관 참사관
한국농업연수원장
– 반고가 천지를 창조하고, 여와가 인간을 만들고, 삼황오제가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고 다스렸다. 
  * 본문에 나오는 한자지명과 인명은 한글로 표기함
반고 사진

반고 사진

  오늘은 중국의 고대 신화전설 시대를 중심으로 얘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역사는 보통 기록으로 전해지는 역사시대와 기록되어지지 않는 선사시대로 나눕니다. 대체로 인류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기원전 3천년 경, 즉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 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합니다. 
  선사시대는 구석기 시대를 포함하여 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50여 년 전 제가 중학교 시절 역사를 배울 때, 동아시아에서는 50만 년 전으로 보이는 지금의 베이징 외곽 주구점(周口店)에서 발견된 북경원인(北京原人)이 가장 오래된 인류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 후 1963년 고고학자들이 산시(陝西)성의 남전(藍田)에서 1백만 년 전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 이듬해에 윈난(雲南)성의 원모(元謀)에서 170만 년 전의 원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로써 중국의 최초의 선사시대는 이 원모원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혹 모르죠. 앞으로 고고학자들이 이 보다 앞선 원인을 발굴할 수도 있으니까 얼마나 더 앞당겨질지… 
  원인시대로부터 이어진 구석기시대부터는 중국의 신화전설시대가 이어집니다. 우리의 단군신화와 같은 그런 전설보다 더 신화적이고 허구적인 전설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선 태고시대의 창세(創世)전설이 있습니다. 마치 <구약성경> 첫머리에 나오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비슷한 전설로 반고(盤古)가 천지창조의 조물주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도교 작가인 서정(徐整, 220-265)이 지은 <삼오역기(三五歷記)>와 <오운역년기(五運歷年紀)>에 반고(盤古)의 천지창조 신화와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후세에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후대의 사서에서 위 두 책을 인용하여 반고신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득한 옛날 천지는 검고 흐린 알 같았다. 그 속에서 인류의 조상인 반고가 태어났다. 반고가 그 알속에서 1만 8천년 동안 잠을 자는 동안 알 속의 맑은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하고 흐린 것은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 이 벌어진 만큼 반고의 키도 커져 그 키가 9만 리에 달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갈라졌지만 하늘과 땅이 다시 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반고는 하늘을 계속 떠받쳤다. 이렇게 1만 8천년 동안 반고는 하늘을 떠받치며 성장했다. 이러는 동안 하늘은 더욱 올라갔으며, 땅은 굳어져 마침내 둘 사이가 멀어졌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울 때는 그 눈물이 흘러 강이 되고, 내뿜는 숨결은 바람이 되었으며 흘린 땀은 비와 호수가 되었다. 목소리는 천둥이 되고 눈동자를 번득이면 번개가 쳤다. 기뻐 웃으면 맑게 개이고 노할 때는 구름이 끼어 흐려졌다.   1만 8천년 동안 하늘을 떠받치던 반고는 지쳐 쓰러져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숨결은 풍운으로 소리는 뇌성으로 변했다. 반고의 두 눈은 각각 해와 달이 되었으며, 사지오체(四肢五體)는 산이 되고, 피는 강물과 바다가 되었다. 혈관과 근육은 길이 되고 살은 기름진 논과 밭이 되었다. 솜털은 세상의 초목이 되었고 뼈와 이빨은 광물과 보석이 되었다. 이렇게 반고는 온몸을 바쳐 세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중국인들은 대단한 상상력이 동원된 이러한 신화에 맞춰 유적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천지개벽한 반고에 대하여 사람들은 랴오닝성의 금주(錦州)시의 바닷가에 있는 한 산이 마치 반고가 두 개의 붓걸이 형상처럼 선채로 있는 모습이라고 연상하여 필가산(筆架山, 필가산, 비자산)이라 이름 짓고, 그 정상에 <盤古開天之處(반고개천지처)>라는 글이 파인 커다란 석물을 만들어 놨습니다. 주변에도 도교나 불교적 색채가 많은 유적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천지창조 전설은 <삼황오제>전설이 나온 춘추전국시대 후인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허구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학자들은 인도와 주변 민족들의 신화전설 등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 후 사람들이 구약의 창세기 등 여러 설화를 보고 여기에 여러 가지 살을 붙여 내려오면서 오늘날 전해지는 신화로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거나 황당하기도 하고 좀 뻥이 세고 내용이 거창하지만 재미있게 꾸며진 신화입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천지개벽과 더불어 인간 창조에 대한 신화도 만들어 냈습니다.
여와  여와(女媧)가 인간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대세입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황제(黃帝)와 상변(上騈), 쌍림(雙林), 여와(女媧)라는 네 신(神)이 같이 흙을 갖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룹니다. 상변은 눈, 코, 입, 귀를, 쌍림은 손발을 만들고, 황제는 가장 중요한 남녀의 성기를 만들고, 여와는 이런 작업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여와는 앞선 세 신(神)이 만든 재료를 모아 정성껏 인간을 빚어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계속하다가 싫증을 느껴 진흙 속에 새끼줄을 휘저었다가 끝에서 떨어진 것으로 대충 인간이 되게 하였습니다. 앞서 정성껏 만든 인간은 부귀한 자가 되고 뒤에 아무렇게나 만든 것은 비천하고 범용(凡庸)한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 창조를 어느 정도 마친 여와는 인간에게 천명을 부여하고, 남녀가 교합해서 스스로 자손을 번식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여와의 은혜를 받들어서 고매(高禖, 혼인의 신)로 모시고 감사하였습니다.
여와와 복희

여와와 복희

  여와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삼황 중 맨 앞인 복희의 아내라고도 합니다. 인류의 구원자라고 추앙을 받게 되는 전설입니다. 인간창조와 함께 여와는 보천(補天), 즉 천공을 보수하는 사업을 하여 인류를 구원한 여신으로 떠받치게 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수신(水神)인 공공(共工)과 화신(化神)인 축융(祝融)이 큰 싸움을 한 끝에 싸움에 진 공공이 너무나 속이 상해서 그만 자기 머리를 부주산(不周山, 곤륜산으로 추정)에 부딪쳤다. 산꼭대기에는 하늘을 떠받드는 하늘기둥과 대지를 이어 매는 땅 줄이 있었는데 공공이 난폭한 짓을 하는 바람에 하늘기둥이 부러지고 땅 줄이 끊어져서 하늘은 서북으로 땅은 동남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구멍이 뚫린 하늘로부터 큰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하천은 대홍수로 범람하여 산림에서 서식하던 맹수와 흉조들이 발악을 하며 뛰쳐나와 인간을 마구 잡아먹으려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것을 본 여와가 급히 강 속에서 오색 돌을 따서 불에 녹여 반죽을 한 다음, 하늘에 뚫린 큰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사는 거대한 거북의 네 발을 잘라 부러진 천주의 대신으로 삼고 또 물가에 난 갈대를 베어 모아 태워 그 재를 쌓아 범람하고 있는 강물을 막았다. 맹수와 흉조도 모두 때려잡아 겨우 지상의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천지가 기울어진 것은 완전히 고치지 못했으므로, 지금도 중국 대륙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아져 기울어진 그대로이며(서고동저), 홍수가 자주 나 때때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한다.’
  이처럼 인류만물의 어머니이자 구원자인 여신 여와는 인류의 조상으로 꼽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모계씨족사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반고의 천지창조와 여와의 인간창조에 이어 혼인제도가 생겨 인류가 번성하게 되니 가정부터 시작되는 인간사회가 이뤄지면서 필연적으로 씨족사회와 부족사회가 나타나게 됩니다.
  부족장 등 지도자들이 지혜를 주고 다스리는 시대로 바로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입니다. BC21세기 이전, 즉 4천여 전 시대입니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로 세 명의 황(皇)과 다섯 명의 제(帝)를 말합니다. 이들 여덟 명의 제왕은 중국 문명의 시조로 추앙되며 근대 이전에는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되어 있었으나, 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삼황오제 신화가 후대에 사람들이 옛날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에 상상력을 더하여 창조되고 종교색채를 더하여 부풀려진 신화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하여 국가차원의 개입을 통해 삼황오제를 실존 인물로 격상하려 하는 국수주의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삼황오제에 관한 전설은 언제부터 나오기 시작했을까요? 역사시대라 하는 은나라 때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주나라 후반기인 전국(戰國, BC475-BC221)시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삼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십팔사략(十八史略, 원나라 증선지가 지은 고대역사서)>에 나온 태호 복희(太昊 伏羲), 염제 신농(炎帝 神農),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삼황이라 합니다. 이들은 맨 처음 세 명의 왕도 아니고, 연속적인 세 명의 왕이 아닙니다. 각각 인류문명에 필요한 획기적인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삼황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태호 복희는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어 점을 치고 글자를 발명하였습니다. 또 여와를 아내로 맞아 혼인의 법을 정했습니다.
  염제 신농은 사람 몸에 소머리를 가졌습니다.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고,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쳐 상업의 신으로 신봉되었습니다.
  황제는 염제 이후 몇 백 년이 흘러 대략 4-5천여년 전에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수레를 발명하고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넓히고 전쟁의 무기인 활과 지남차를 발명하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치우(蚩尤)를 쳐 평정하였습니다. 황제는 황허유역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통치하고 번성하여 화하족(華夏族)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중화민족을 염제와 황제시대를 합쳐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치우로 추정되는 한나라때의 조각

치우로 추정되는 한나라때의 조각

  황제에게 망한 치우를 사람들은 동이족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치우는 신농의 후예로 중국 대륙의 동쪽을 지배하는 신이었으며, 한반도를 포함한 동이족을 다스리는 신이었다고 합니다. 눈이 4개이며 손이 6개 그리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를 가진 이상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습니다. 돌과 쇠를 먹고 싸움에 정말 능한 신으로 추앙되었습니다. 그래서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 응원단이 내건 걸개에 ‘붉은 악마’를 그렸고 응원복장에도 붉은 악마를 새겼는데 바로 치우천황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동이족 즉 우리민족의 조상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요

‘제요(帝堯)’ 군주

  이제 오제로 들어가 봅시다. 다섯 임금이란 뜻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십팔사략>에 의하면,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등 다섯 분을 말합니다. 소호는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습니다. 소호의 뒤를 이은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습니다.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와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습니다. 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이었습니다.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순

‘제순(帝舜)’ 군주

  이제부터 요와 순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사기> 등 여러 역사서에 따르면, 요는 제곡의 아들로 20살에 왕위에 올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화합하고 백관의 직분이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고 합니다. 계절의 구분에 따라 농사의 적기를 가르쳐 주고, 독단적인 정치를 경계하였습니다. 요의 만년에는 황하가 범람하여 큰 홍수가 나서 아들 곤(鯀)을 시켜 9년 동안 치수공사를 하게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후계자를 물색하던 중 신하들의 추천을 받아 효성이 지극한 순(舜)을 불러들여 두 딸을 시집보내고 여러 가지 일을 맡겨 순의 사람됨과 능력을 시험하였습니다. 3년 후 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기고, 20년이 지난 후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다가 8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舜)은 전욱의 후손으로 제왕의 후손이나 여러 대를 거치면서 지위가 낮은 서민이 되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모친이 죽고 부친이 계비를 들여 아들 상(象)을 낳았는데 부친이 상을 편애하여 순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순은 부모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잘 피하면서 효도를 다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요가 순을 등용하고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순이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변방에 은거하였습니다. 백관과 백성들이 은거한 순을 찾아와 왕위에 오르기를 간청하므로 천명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돌아와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순은 여러 신하들을 전문적인 직분에 따라 임명하였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회유하여 넓은 강역에까지 통치가 미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우(禹)를 등용하여 마침내 치수에 성공하였습니다. 우의 성공적인 치수로 농토가 증대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순의 뛰어난 인재 등용을 칭송하였습니다. 우의 공로가 뛰어났고 아들 상균(商均)이 왕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은 재위 22년 만에 우를 후계자로 삼았으며, 재위 39년에 남쪽을 순수하던 도중 사망하였습니다.  요와 순 두 임금에 대한 내용이 좀 자세하고 확실하진 않지만 제위 연수도 나오는 것을 보면 나름 근거가 있어 보이는 사실에 가까운 듯한 전설입니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가 늘 요순시대를 찬양하며 군주의 도리를 일깨워 준 것을 보면, 꼭 허구적인 얘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요와 순의 역사적 실존이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다만, 순 이후 이어지는 우와의 관계에서 하(夏)나라 이전에도 국가 비슷한 실체가 형성되어 있었지 않겠나 하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어쨌거나 상고시대의 대표적인 성군(聖君)으로 손꼽히는 요와 순은 그래서 중국 문화권에서는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 요순과 같다고 찬양하는 관용표현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습니다. 뛰어난 군주의 치세를 일컬어 요순시대라 부르기도 하여 태평성대와 같은 의미의 관용 표현이 되었습니다. 또한 혈연관계가 없으나 능력을 갖춘 인재를 찾아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禪讓)을 행하여 칭송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역성혁명을 꾀하던 자들이 요순임금의 예를 들며 자신이야말로 백성의 신망을 받는 지도자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필자 정문섭 배너(최종)_20140407
 


<저작권자Ⓒ 시사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