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6년 2월 26일 금요일 오후 10시 24분

정문섭의 중국이야기 – 「중국 역사를 탐방하다」(6)

 

제 2. 국가의 건립과 사회의 변혁

 

(6) 춘추전국(春秋戰國)의 분쟁

  서주 시대에 적정(敵情)이 있으면 봉화대에서 경보를 알렸다. 낮에는 이리의 변을 태워 짙은연기를 내어 경보를 알리고 밤에는 나무와 풀을 태워 화광으로 알렸다. 농연(濃煙)과 화광을 나타내 적정을 매우 빠르게 각지에 전파하였다. 이에 맞춰제후들은 병사를 이끌고 주 천자를 보위하였다.
  서주 말 유왕(幽王)이 우매하고 무도하였다. 왕비 포사(褒姒)가 웃지 않으므로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만 봉화를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각지의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도성에 이르렀으나 왕과 포사가 성 위에서 도성까지 급히 오느라 완전히 지치고 또 속아 넘어간 병사들을 보면서 박장대소하였다. 나중에 융족(戎族, 서쪽 이민족)이 정말로 주를 공격하였다. 유왕이 급히 봉화를 올리게 하였으나 제후들이 다시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그 결과 유왕이 피살되었다.
  그 후 서주는 멸망하였다. 결국 천자의 권위가 여지없이 떨어지고 제후들이 분쟁하는 상황이 출현하였다.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춘추 쟁패
  BC770년, 주 평왕(平王)이 동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하였다. 역사는 이를 동주(東周)라 하였고 동주는 다시 춘추와 전국으로 나눠졌다.
  춘추시대 제후들은 더 이상 천자의 명령을 듣지 않고 천자는 오히려 강력한 제후에게 의존하였다. 각지 제후들은 부단히 전쟁을 일으켜 강대하게 된 제후는 약한 국가들에게 그의 수령의 지위를 인정하도록 강요하여 이른 바 ‘패주(覇主)’가 되었다. 유명한 패주로 제(齊) 환공(桓公), 진(晋) 문공(文公), 초(楚) 장왕(莊王) 등이 있었다.

  제는 산동 북부지역으로 수산물과 소금이 많이 생산되어 경제적으로 풍요한 지역이었다.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삼아 내정을 적극 개혁하고 생산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군제를 개혁하여 강대한 군대를 만들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표면상 천자를 존경하고 천자의 영향을 이용하여 다른 제후들을 호령)로 영토를 넓혔다. 개혁을 통해 제는 부국양병에 성공하였다. BC7세기 중기 제가 제후회맹(諸侯會盟)을 공개적으로 소집하고 주 천자가 신하를 보내 참가하였다. 이로써 제 환공이 춘추시기 첫 번째 패주가 되었다.

  진 문공(文公)도 춘추시기의 또 다른 패주였다. 그는 장년시절 나라 내분으로 인해 다년간 나라밖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일반백성들의 괴로움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군주가 된 후 내정을 정돈하고 생산을 발전시키고 군대를 잘 훈련시키니 얼마 안가 북방 일대의 강국이 되었다. 당시 남부 초나라의 세력이 이미 황하유역에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BC7세기 후기 진과 초가 성복(城澓)에서 큰 싸움을 벌여  초가 대패하였다. 이로부터 진 문공이 중원의 패주가 되었다. 이후 진과 초의 쟁패전(爭覇戰)이 백여 년 간 지속되었는데, 후에 초 장왕이 진을 대패시켜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성복전투 시, 진과 초 양군이 중원의 전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결전을 벌이기 전에 진군이 ‘이전에 중이(重耳, 즉 문공)가 초나라에 의탁했을 때 초 왕이 후하게 접대하므로 나중에 진의 군주가 되어 만약 초와 전쟁이 나면 진군이 3사(1사 ; 30리) 거리만큼 물러주겠다고 약속한 ‘퇴피삼사(退避三舍)’를 언급하면서 군대를 뒤로 물려 성복에 주둔케 한 후, 교묘히 초군의 예봉을 피하고 적군을 깊숙이 유인하여 초군을 대패시켰다.

  춘추 말년 강남의 오(吳)와 월(越)이 쟁패전에 들어갔다. 오왕 합려(闔閭)가 초의 오자서(伍子胥)와 제의 손무(孫武)를 장군으로 영입하여 초의 도성 영(郢)을 기습 공격하였다. 초는 다행히 진(秦)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았다. 나중에 오와 월 양측 간에 이기고 지는 전쟁이 이어졌다. 오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夫差)가 월을 쳐 대패하게 하여 월왕 구천(句踐)으로 하여금 부차에게 칭신(稱臣)하게 하였다. 부차가 구천에게 그 부인과 같이 오에 와 부차의 마차를 끌고 말을 키우게 하며 궁실을 청소하는 일을 시켰다. 그들은 각종 굴욕을 인내하다가 3년이 지난 후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귀국하게 되었다.

 

제 6강 춘추전국(春秋戰國)의 분쟁1

 

구천은 치욕을 씻기로 뜻을 세우고 나라를 강대하게 하는데 진력하고 분발하였다. 구천이 오에 잡혀와 있을 때, 방안에 쓰디 쓴 쓸개를 달아놓아 그 맛을 보고 나무 섶 위에서 자며(와신상담, 臥薪嘗膽)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망국의 치욕을 잊었느냐?’ 귀국한 구천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민심을 얻고 병마를 단련시켜 오를 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오랜 기간의 준비를 거쳐 월이 마침내 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후에 구천이 북상하여 제후회맹을 주관하여 패주가 되었다.

  춘추시기의 쟁패전은 사회에 수많은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쟁패과정 중 어떤 제후는 소멸되는 동시에 영토가 넓어진 나라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전국칠웅(戰國七雄)
  전국 초기 진(晋)의 경대부 한(韓)·조(趙)·위(魏)씨가 진을 나눠가졌다. 얼마 후 제는 대부 전(田)씨가 원래의 군주를 내쫓고 전씨가 군주가 되는 제나라로 바뀌었다. 이처럼 제(齊)·초(楚)·연(燕)·한(韓)·조(趙)·위(魏)·진(秦) 등 칠웅이 병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전국시기 각 나라 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는데, 계릉지전(桂陵之戰)·마릉지전(馬陵之戰) 등 유명한 전쟁들이 이 시기에 발발한 것이었다.
  * BC4세기 중기 위 대장 방연(龐涓)이 대군을 이끌고 조의 도성 한단(邯鄲)을 쳤다. 조가 급히 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제왕이 손빈(孫臏, 손무의 손자)을 군사로 명하여 구하게 하였다. 손빈이 위의 내부가 빈틈을 노려 바로 위의 도성 량(梁)으로 진격하였다. 방연이 할 수 없이 철수하여 회군하게 되었는데, 먼 길을 오느라 지친 위의 군이 계릉에 왔을 때 제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여 돌아갔다. 위를 포위하여 제를 구한 이 전쟁은 역사상 유명한 한 전쟁이 되었다.

  10여년 후 제와 위 간에 또 큰 전쟁이 났다. 제가 손빈을 보내 감조계(减竈計, 군대 주둔지 취사 터를 매일 줄여 나가 위로 하여금 제의 군사들이 도망친 것으로 오해하게 하여 제의 진영에 경솔히 깊숙이 들어오게 한 계책)을 써 적군을 깊숙이 유인하였다. 위가 방연에게 10만 대군을 붙여 제를 치게 하였다. 방연이 경솔하게 적을 얕잡아 보고 맹공을 폈으나 마릉에서 매복에 걸렸다. 제 군이 많은 양의 활을 일제히 쏘아 제압하니 방연이 자살하고 위의 주력이 섬멸되었다. 이로부터 위가 크게 쇠락하고 제는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말기 강대한 진이 부단히 전쟁을 일으켜 동쪽의 여러 나라를 쳐 영토를 넓혔다. BC260년 진과 조 간에 대단히 큰 규모였던 장평지전(長平之戰)이 발발하였다. 조군이 대패하여 40여만명이 포로로 잡히고 이들 대부분이 매몰되어 죽었다.

  *조는 전국 후기 동쪽의 강대국이었다. 진이 동으로 진공해 나가자 조 왕이 노장 염파(廉頗)에게 장평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진군이 부단히 공격하였으나 염파가 나오지 않고 수비에 치중하니 쌍방 간 대치가 길어졌다. 진군이 염파가 진에 항복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조왕이 과연 이에 속아 염파를 소환하고 조괄(趙括)을 보냈다. 조괄은 지상담병(紙上談兵)한 실전경험이 없는 자라 경솔히 출격했다.

진의 백기(白起)장군이 복병을 배치하고 조군을 포위하고 식량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조군이 포위된 지 46일, 식량이 바닥나고 지원군이 오지 않으므로 조괄이 최후의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결과, 조괄이 화살에 맞고 조군 대부분이 진군에 투항하였다.

 

제 6강 춘추전국(春秋戰國)의 분쟁2

 

  이 강에서는 BC770년부터 약 550여 년 간 지속된 춘추전국시기에 각 나라 간 물고 물리는 전쟁과 흥망을 다루고 있다. 패자(覇者)가 되거나 멸망하는 나라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흥망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춘추란 공자(孔子)가 지은《춘추》가 이 시기의 역사를 싣고 있어서 유래되었다.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BC722)부터 애공(哀公) 14년(BC481)까지 242년 동안의 역사와 다른 제후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전국이란 명칭은 서한 말기 유향(劉向)이 지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 춘추와 전국을 가르는 연도에 대하여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중교과서》는 BC770-BC476년, 전국시대를 BC475-BC221년으로 잡고 있다.   

  춘추 초기에는 천 여 개나 되던 제후들이 약육강식에 의해 140여개로 줄어들고 다시 10여개의 강국으로 줄어들었다. 진(晋), 초(楚), 제(齊), 노(魯), 진(秦), 송(宋), 위(衛), 진(陳), 채(蔡), 조(曹), 정(鄭), 연(燕), 오(吳), 월(越) 등이 있었다. 이중 가장 강력한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여 시기 순으로 제 환공, 진 문공, 진(秦) 목공(穆公), 송(宋) 양공(襄公), 초 장왕을 들었다. 또는 진 목공과 송 양공을 포함하지 않고 오 합려와 월 구천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제·초·연·한·조·위·진 등 칠웅이 병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각 나라가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가운데 말기에 변법운동으로 특히 세력이 커진 진에 의해 통일되었다.

 

 

정문섭 박사 프로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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