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6년 4월 25일 월요일 오후 3시 37분

[차세대리더 4호] 인시스템즈(INSYSTEMS) 김영로 대표

 

꿈꾸는 자는 그 꿈을 이룬다

세계정상의 에너지절약 전문회사 만드는 게 꿈

늦깎이 박사학위로 대학 강단에

 

어린시절 집에서 혼자 놀기만 좋아하던 내성적인 일곱 살의 어린 아이가 이버지와 삼촌들도 못 고치는 선풍기를 고쳐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훗날 대기업 등에서 전기분야에 많은 개발성과를 올렸지만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며 많은 어려움 겪었다. 늦깎이로 56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인생의 후반을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인시스템즈(INSYSTEMS)의 김영로 대표.

김영로 대표는 현재 회사를 경영하면서 순천향대학에서 강의하며 취미생활로 음악활동을 하는 등, 100세 시대를 젊게 열어가고 있다.

김희경 선임기자(donga338@hanmail.net)

 

김영로 대표_9653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던 어린시절

김영로 대표는 보통의 어린이와 다른 어린시절을 보냈다. 4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김 대표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성격이 바뀌어 외향적이지만 당시만 해도 밖에 나가 노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그것은 아마도 부친의 영향인 것 같다고 했다. 부친은 김 대표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글자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김 대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화, 소설 등을 많이 읽었다. 자연스럽게 혼자 노는 방법을 그때 터득하게 된 것이다.

당시 부친은 주로 아연을 원자재로 쓰는 전기배관부속품 제조공업을 했다. 주요 부품인 아연궤 (덩어리로 된 원자재)가 귀하여 고물자동차 부품, 수류탄 뇌관파편 등을 고물상으로부터 구매하여 석탄으로 녹여서 가공했다. 이때 고물들을 분해하여 분류작업을 하는데 이 작업은 주로 김 대표의 몫이었다. 그러한 일을 좋아한 김 대표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자동차 기화기(캬브레다)의 원리, 수류탄의 기폭원리, 대공포탄의 시한관원리 등을 실물을 분해해가며 부친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김영로 대표  1142684006

그러던 중 매우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일곱 살 때, 부친과 삼촌이 고치지 못한 몸체가 통아연으로 되어있는 미제 고물 선풍기를 스스로 고친 것이다. 분해를 해 보니 모터 회전자에 전기를 공급하는 흑연 연결막대 즉 브러시가 깨져 있었다. 그래서 그 대용품으로 건전지 탄소봉을 생각하게 되었고 폐 건전지의 탄소봉을 가공하여 브러시 대용으로 조립하였더니 신기하게 선풍기가 돌아가기 시작 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부친과 삼촌 그리고 온 가족들이 많은 칭찬을 해 주었다. 당시 하루에 10원을 받던 용돈이 50원으로 올랐다. 이 일로 인해 김 대표는 더욱 더 통신전자 쪽에 관심을 갖게 되어 아이들이랑 놀기보다는 집에 와서 전자석을 이용한 장난감을 만들거나 학생과학 등 과학에 관련된 책 읽기와 라디오, 무선 마이크 등 전자에 관련된 제작을 직접 했다. 매일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어 운동도 잘하지 못했지만 친구들 간에 친화력이 있어서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창신초등학교 어린이회장도 했다.

 

무선 마이크를 만들어 사설방송을 하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김 대표는 주로 청계천8가 고물시장을 자주 다녔다. 그 곳에 가면 망가진 라디오, 앰프 등을 아주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진공관 라디오를 이용하여 중파 무선마이크를 만들면 2~3 킬로 거리는 방송이 되므로 밤이면 불법 사설방송을 하며 동네 친구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C.C.R.이나 탐죤스 등의 팝송을 들려주기도 했다. 이런 재미도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끝이 났다. 학교성적이 너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대표는 당시에 명문인 경기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중3 올라갈 때 까지 열심히 공부한 결과 전교에서 5등 이내에 들게 되었다. 전교 5등이면 경기고교에 무난하게 입학 할 수 있었으나, 성적을 더 올리고 싶어서 담임선생님께 부탁하여 공업을 특별지도 받았다. 공업과목은 모든 내용이 전자기술의 이론과 실기였다. 담임선생님 덕택에 모의고사는 거의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아 원하는 경기고등학교 시험을 쳤다. 시험은 아주 쉽게 잘 치렀고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재수하겠다는 김 대표를 누나와 어머니가 적극 말려 중앙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미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상당기간 방황의 시간을 보낸 뒤 고3이 되어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려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과학이나 수학은 그런대로 되는데 영어는 중3 실력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광운공대 전자공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음악과 만나 대학가요제에 출전하다

대학에 입학 후 김 대표는 친구들과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리드기타를 맡아서 연주활동을 했다. 연주 하고자 하는 음악을 들으며 채보를 하고 악기별로 나누어 편곡하고 지도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또한 음악 활동하는 애들은 ‘날라리’라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전기 전자에는 소질이 있어도 음악에는 소질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영로대표.684867911제2회 MBC 대학 가요제 예선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3년간 열정적으로 음악활동을 하던 그룹 21st Century를 해체했기 때문이다. 그는(주어삽입)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주인공 샤리에르가 통탄했듯이 욕망은 있으되 재능은 없었던 것 같다고 자평한다. 그때의 미련 때문인지 지금도 유라이아힙이나 그랜드펑크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하다(뛴다?). 당시의 추억을 되살리려 현재 김 대표는 기타동호회에서 연주활동을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야외공연도 하고 동호회 회원들에게 기타강습도 하고 있다. 그는 음악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준다고 말한다.

 

집안에 불어 닥친 부친의 병마로 인해 졸지에 가장이 되다

그 후 한동안 평탄 하리라던 김 대표의 인생에 역경의 시간이 닥쳤다.

인생의 지표로 삼았던 부친이 암에 걸려 타계한 것이다. 졸지에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세상의 큰 날개를 잃은 기분이었다. 시름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친구 집에서 알게 된 지금의 아내와 대학 4학년 때 결혼을 했다. 그 해(1979년) 한국 실정은 매우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와 2차 오일쇼크로 지금의 IMF를 방불케 하는 혼란한 시기였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꿈을 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내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김 대표는 아내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다”며 김 대표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디다

대학 졸업을 한 김 대표는 마산에 있는 탠디 코퍼레이션(Tandy Corporation) 전자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TC전자는 미국 내 Radio Shack이라는 브랜드로 전세계에 10,000여 개의 체인망을 구축하고 있는 유명한 가전전문 회사로 미국본사 및 R&D 센터가 있고 일본에 TCJ라는 아시아 담당 R&D회사 그리고 한국, 대만, 싱가폴에 생산공장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회사에 입사하니 책에서만 보던 측정장비, 개발장비 등 각종 부품들이 온 천지에 널려있어 무엇이든지 만들고 실험할 수 있었다. 또한 보기만 해도 쟁쟁한 기술자들이 무엇인가 연구하고 개발하는 모습이 꿈만 같았다. 아마도 세종대왕시절에 장영실이 주자소에 들어갔을 때 이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김 대표는 집에서 혼자 기다리는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도 모르고 매일같이 통금시간까지 열심히 일했다.김영로대표-888866444

그렇게 연구에 매진한 결과 공중페이져(삐삐)의 전신인 로컬 페이져 라는 것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지금처럼 이동통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공장 병원 등에서 지역적으로 송신하고 수신하는 장치였다. 개발 납기를 맞추느라 2개월 동안 집에도 가지 않고 개발실에서 하루에 4시간 자면서 개발을 했다. 이때 아내가 매일 밤 밤참을 만들어 회사로 가져다주며 김 대표의 연구를 격려해 주었다. 이러한 아내의 후원에 힘입어 드디어 페이져 개발이 완성될 수 있었고, 미국시장 호응도가 좋아 200만 세트 이상이 수출되고 김 대표는 말단사원에서 과장급으로 특진하게 되었다.

이후 김 대표는 3년간 같은 계열의 일본의 TCJ에서 연구개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말로만 듣던 일본 기술자들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한번 기술자면 영원한 기술자였다. 그에 반하여 우리는 폴리티컬한 기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들어 백발인 부장들도 실험실에 들어와서 납땜인두를 잡고 실험을 하는데 우리는 과장이상만 되면 실무 기술에서 손을 놓고 정치에만 전념한다.

이후 TC를 그만두고 김 대표는 이천 현대전자 자동차 전자장치 개발부로 들어가 한 연구팀을 맡아서 일하게 되었다. 이 팀에서 몇 개월째 해결하지 못하던 개발 아이템이 있었는데 김 대표가 맡고 나서 일주일 만에 해결되었다. 그 후 1985년 자동차 주행 정보 컴퓨터, 자동항법장치(네비게이션시스템) 등을 개발하던 중 한국통신 관련회사에서 전자교환기 국산화작업의 일환으로 전화요금 기록 장치를 개발하기 위하여 김 대표를 필요로 했다. 회사 관계자의 간곡한 설득으로 그 회사에 가게 되었고 3년간 노력 끝에 국산화 개발에 성공하여 현재 국산 전자교환기 TDX Series에는 김 대표가 개발한 전화요금 기록장치가 채용되어 있다.

 

창업을 했으나 부도의 어려움을 겪다

김 대표는 1989년 4월 연구개발 전문회사를 운영하고자 오스트기술연구소

를 창업했다. 창업이후 연구에 매진한 결과 창원, 경남에 있는 각 대기업으로부터 각종 개발의뢰를 받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연구 개발을 좋아하는 김 대표로선 마음껏 개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2년간 거의 50여 가지의 각종 제어장치를 개발하여 납품했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삼성전관에 형광표시관 자동검사시스템, 삼성항공에 렌즈심취기, 금성산전에 PLC 통신 모듈, 기아정기에 자동차 브레이크부스터 검사시스템, 기아자동차에 엔진 자동검사기, 대우 중공업에 PLC개발, 대우전자에 디지털피아노 교육용 통신장치, 효성중공업에 자동주차제어시스템 등 종류가 하도 많아서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역경의 시기가 찾아왔다. 힘들게 유치한 공업발전기금으로 전화교환기 보조 장치인 지능화 MDF를 개발했는데 사업화 자금을 만들지 못하여 전전긍긍 하는 동안 스웨덴의 에릭슨에서 유사제품이 먼저 수입 되어 회사의 모든 자본인 4억이나 들어간 연구가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확한 개발의 시기를 맞추지 못한 것과 규모에 맞지 않는 개발비 투자 등 미숙한 점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 던 중 전기에너지 절감장치 개발이라고 하는 당시 과기처장관에게 보고한 연구개발 보고서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 자료를 검토하고 시장조사를 해본결과 에너지절약 사업의 사업성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전력부하제어시스템 즉 EPS의 개발을 착수했다. 전 직원이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4개월 만에 시제품이 완료되었다.김영로대표 -833510458

그러나 문제는 영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사용자들은 보다 구체적인 검증자료를 필요로 했고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전국 각 지역에 시범설치를 했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자금은 모두 바닥나고 직원들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개월간은 버틸 수 있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더 이상 직원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회사를 떠날 때마다 서로 눈물을 흘리며 재기를 약속했다. 이때 김 대표의 심정은 부하를 한명씩 전사 시키는 마음이었다. 김 대표 자신의 가정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가지고 있던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갔고 전세금까지 빼내어 어음을 막은 후 가지고 있던 어음장은 은행으로 반납했다. 어음을 계속 사용하다가는 꼭 사고를 낼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가족들은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김 대표는 당시 아내와 딸들에게 너무 미안했었노라고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결국 부하들은 모두 떠나고 김 대표는 가족들과 영업도 하고 공사도 해야 했다. 아내는 한전, 경기도청, 에너지관리공단으로 다니면서 홍보를 했으나 돌아온 것은 실망뿐이었다. 중소기업제품은 성능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회사의 흥망을 보장 받을 수 없어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너지관리공단에서는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 김 대표가 개발한 EPS는 에너지 절약제품이므로 공단에서 사용자에게 시설비전액을 장기 저리로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업상 매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EPS의 시험설치의뢰는 계속 들어왔다. 하지만 엘지25 편의점의 의뢰로 시범 설치할 때는 자금이 부족해서 주변에 부탁을 해 보았지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설치에 사용할 선재를 구할 돈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중3이었던 막내딸에게 부탁을 했다. 밤새도록 둘이서 쪼가리 선재를 연결하여 공사준비를 하고 아침에 선생님께 전화하여 사정을 말하고 설치현장으로 갔다. 각고의 노력 끝에 1년 반이 지난 후 엘지유통으로부터 3억5000정도의 주문을 받았고, SK에너지판매㈜산하 주유소에 10억원 이상을 공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직원도 없이 연구개발에서부터 제조까지 혼자서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EPS Operating 프로그램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앞이 가물가물하더니 뿌옇게 흐려지면서 이내 캄캄하게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어서 몹시 당황했다. 꼭 물에 빠져서 숨을 못 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영영 앞이 안 보일 것 같았다. 기술은 있으되 운이 없는 남편과 아빠를 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고 지금까지 힘들어도 불평 한마디 없이 감싸주던 아내와 딸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보이지 않는 눈에서 뜨겁고 끈끈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병원에 가니까 과로하지 말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취하며 강한 빛을 주의하라고 신신 당부했다. 다행히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재기를 위한 도약에 서다 — 예전 직원들이 다시 모이다

일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며 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당시 직원들은 돈이 없어 급료를 받기는커녕 집에서 돈을 가져와 김 대표를 도울 정도로 회사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예전의 직원들이 심기일전하여 모였으나 정작 회사와 김 대표는 이미 은행에 적색거래자로 등재되어 있었으며, 창업자금 또한 없는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직원들이 자금을 만들어 와서 법인 설립자금은 마련을 하고 1998년 4월 오스트 세이빙테크 주식회사를 설립했다.김영로 대표 1567358402

회사를 설립하고 전 직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SK에너지판매 주유소에 무사히 납품을 완료하고 나니 엘지 25편의점 쪽에서 연락이 왔다. 어떤 회사에서 만든 절전기를 채택하였는데 성능상의 문제가 심각하여 납품업체를 변경하고자 하니 EPS를 납품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받게 된 엘지25 편의점 오더 150대는 SK때의 경험을 토대로 노력한 결과 쉽게 처리되었다. 이렇게 하여 깊이 패었던 실패의 골짜기는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엘지정유판매에 영업 진행 중 뜻하지 않은 방해꾼을 만난 것이다. 애써 노력하여 엘지정유판매에 EPS 약 700여대를 판매할 계약단계에 왔는데 우리회사의 프리랜서 영업맨이 배신을 하여 회사를 하나 만들고 경쟁업체의 제품을 가지고 엘지정유판매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장의 친인척임을 사칭하며 EPS를 배제하고 경쟁회사제품을 채택하도록 실무 부서장 및 임원 등을 종용했다. 결국 실무자들은 엘지25편의점에서 성능상의 문제로 사용 중단된 경쟁사 제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표면상의 이유는 EPS가 경쟁사 제품보다 5만원 비싸다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가 어떠한 가격을 제시 하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일을 겪고 난 후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 기업을 해나가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이로 인하여 영업상에 많은 차질이 생겼고 김 대표는 또 다시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아내의 말대로 ‘공부’에 전념하다

거듭되는 실패와 배신 속에서 생을 포기하려 했으나 착한 아내와 딸 들이 눈에 밟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아내가 “집안은 내가 꾸려 갈 테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면서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다” 아마도 아내는 김 대표가 공부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김 대표가 다시 한 번 재기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 대학원 문을 두드렸다. 서른 살이나 어린 학생들과 같이 공부한다는 것이 좀 그랬지만 아내의 간곡한 바램을 저 버릴 수 없었다. 드디어 김 대표는 50대 늦은 나이에 충남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학위를 따는 동안 아내는 어린이집 교사를 하며 석사과정의 전 등록금을 대 주었다. 집안 살림을 이끌어 가는 것도 벅찬데 석사과정 등록금을 대 준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김 대표는 고진감래의 마음으로 공부한 결과 드디어 석사학위를 거머쥐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했다. 석사학위를 손에 쥐니 아내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김 대표는 내친 김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피나는 노력으로 2012년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하는 동안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등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논문이 영국의 저명한 논문지인 Electronics Letters SCI 게재되었으며 졸업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등 역경을 극복한 만학도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학에서 강의가 들어왔다. 항상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했지만 대학 강의와 특강을 통해 자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김 대표는 EPS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한편 새로운 아이템 개발에 매진하여 가로등 감시제어장치(LMCS)라고 하는 첨단 장치를 연구하여 특허를 받는 한편, EPS가 내장되어 있어 절전까지 되는 제품의 품질시스템을 정비하고 훈련하여 국제품질인증규격인 ISO9002를 획득했다.

 

인시스템즈(INSYSTEMS)의 비전

2013년 김 대표는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연구한 시스템을 사업화에 접목하여 인시스템즈(INSYSTEMS)를 설립했다. 인시스템즈(INSYSTEMS)에서는 주로 무선원격 제어에 사용되는 시스템을 연구개발, 기획, 유통, 판매하는 회사로서 장치안테나를 이용한 첨단 산업이다. 현재 국책연구 자금을 활용하여 연구개발 및 보급을 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무선을 이용한 스마트 팜(SMART FARM)에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농장감시, 작물 물주기, 냉해방지, 침입방지 등 비닐하우스 옆에 살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중개장치와 비닐하우스내의 무선 센서를 획기적으로 확장하여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실례로 기존의 제품은 비닐하우스 4-5개를 관리할 수 있지만 김 대표가 개발한 시스템은 한 마을의 비닐하우스를 관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으로 수익창출에 이바지 하고 있다. 또한 2014년부터 시작한 지중 매설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통신선로 전자센서탐지 시스템을 국책연구자금을 지원받아 연구 중에 있다. 사고로 인해 발생되는 소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김영로 대표_(마지막 페이지에 필수)9656

이제 깃발은 올랐다. 역경을 극복한 김 대표는 5년 이내에 인시스템즈 (INSYSTEMS)를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흙 같은 상황에서도 세계정상의 에너지절약 연구 전문회사를 만들겠다는 미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 온 김 대표는 말이 아닌 몸으로 체득한 값진 경험으로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유망한 길을 걷겠다고 했다. “늦게 시작했기에 정말 제대로 해 보고 싶습니다.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에너지절약 연구를 국가기관과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 석유는 40년, 천연가스는 60년 밖에 쓸 수 없다는 화석연료의 고갈시를 대비하여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김 대표의 미래에 대한 당찬 포부가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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