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6년 5월 05일 목요일 오후 8시 45분

정문섭의 중국이야기 – 「중국 역사를 탐방하다」(10)

 

제 3. 통일국가의 건립

(10) 진의 6국 통합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혜부복환(壯士一去兮不復還)”- 바람소리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가워라. 장사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역수 : 하북 역현(易縣)의 강 이름)
전국시대 말년, 형가(荊軻)라고 하는 용맹한 장사가 자기를 알아준 연나라 태자의 은혜에 보답하고 연에 대한 진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결연히 진에 들어가 진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상기 이 비장한 시가 바로 형가가 역수의 강변에서 연의 태자와 이별의 눈물을 흘리며 부른 노래였다. 그러나 형가의 진왕 암살계획은 성공하지 못한 채 오히려 잡혀 죽었고, 진의 공격도 막지 못했다. 형가가 진왕을 죽이려 했던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의 6국 통일과 중앙집권통치의 건립
장평지전이후 동쪽의 각국들이 진의 강대한 공세를 더 이상 막지 못했다. BC230-BC221 진왕 영정(嬴政)이 차례로 6국을 공격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적 봉건국가 – 진 왕조를 세우고 도성을 함양(咸陽)에 두었다.

*진왕 영정은 유능한 인재를 받아들였는데, 예를 들면, 이사(李斯), 몽념(蒙恬), 위료(尉繚), 왕전(王翦) 등이 그들이었다. 이사는 원래 초에서 포의(布衣, 평민 신분)로 지내다가 진왕에 의해 객경(客卿, 타국 출신으로 그 나라에서 관리가 된 사람)이 되었다. 몽념도 중용되어 30만 대군을 지휘하여 북방을 지켰는데 진왕이 특별히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총애하였다. 위료는 당시 군사전략가로 진왕이 뛰어난 군사 인재임을 알아보고 바로 자세를 낮춰 “옷과 음식을 나와 동등하게 하라.”며 높게 대우하였고 나중에 그에게 모든 군사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왕전은 진의 명장으로 진왕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초나라 토벌에 실패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진왕이 친히 왕전을 찾아 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다시 군을 이끌어 줄 것을 여러 차례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초를 정벌하게 하였다.

진은 통일된 모습에 맞춰 봉건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봉건전제의 중앙집권체제를 세웠다. 최고 통치자 황제는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위치에서 군사와 정치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중앙정부는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두어 행정·군사와 감찰을 나눠 맡게 하고, 마지막에 황제가 결단을 내리도록 하였다. 지방은 군현제(郡縣制)를 두어 전국을 36군(나중에 변방을 개발하여 40여개로 늘어남)으로 나누고 그 밑에 현을 두었다. 군현제의 시행은 중국 역사상 길고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진왕은 6국을 통일한 후, 득의양양하여 만족스러운 모습을 띠고 신하들에게 국군(國君)의 칭호를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토론하게 하였다. 이사 등 신하들이 진왕의 공헌과 업적이 고대 삼황오제를 능가한다고 칭송하였다. 진왕은 이에‘황(皇)’과‘제(帝)’를 연달아 붙여‘황제(皇帝)’라 호칭하기로 하고, 자신을‘시황제(始皇帝)’라 칭하면서 후대를 2세, 3세로 칭하여 진왕조가 천세, 만세에까지 이어져 만세 무궁하게 통치해 나가기를 바랐다. 또 그는 스스로를‘짐(朕, 천자의 자칭)’이라 하며 황제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냈다.

통일을 공고히 한 조치들
전국시기에 각 나라의 화폐·도량형·문자의 차별이 매우 커 각지의 경제와 문화교류에 영향을 주었다. 진시황은 우선 전국이 원형방(圓形方, 둘레를 원형으로 하고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을 둔) 동전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동시에 도량형을 통일하여 척촌(尺寸), 승두(升斗), 근량(斤兩)에 대해 획일적인 규정을 두었다. 또 문자를 통일하였는데 소전(小篆)을 규범문자로 삼아 6국이 기존에 사용하던 문자를 폐지하였다. 나중에 또 필획(筆劃)이 더 간단해진 예서(隸書)를 널리 보급하였다.

*전국적으로 서체를 통일시키기 위해 진시황은 승상 이사에게 명하여 소전을 표준적인 문자 본보기로 쓰게 하였다. 문자의 통일은 이후 중국문화의 발전과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고 보호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강역이 매우 넓어 역사적으로 할거국면이 수없이 나타나고 각지의 방언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문자는 시종일관 통일되어 써 오게 되었는데, 이는 진의 문자 통일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상의 통제를 위해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금서령(禁書令)을 내리고 정부 외에 민간의 의학, 점복, 재배에 관한 것만을 놔두고 나머지 기타 서책을 불태우게 하였다. 이후 유가의 경서(經書)에 대하여 다시 담론하는 자를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는 또 몰래 자신을 비판하는 유생들을 함양에서 생매장하여 죽였다. 이것이 역사상 나오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정문섭 제10-1

 

* BC213년, 진시황이 함양궁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많은 신하들이 진시황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이때 유생 순우월(淳于越)이 옛처럼  분봉제로 회복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사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이를 기화로‘유생들이 옛날의 나쁜 것으로 백성들을 혼란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의 잘못이 유생들이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황제에게 금서령을 내리도록 건의하였다. 이듬해 또 일부 유생이 진시황의 성격이 강폭하고 권세를 탐하고 형벌을 남용한다고 비평하였다. 진시황이 알고 크게 노하여 이는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미혹하고 있다며 명을 내려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잡아온 460여 명의 유생을 모두 생매장하였다.

북에 장성을 쌓고 남쪽의 강역을 넓히다
북방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통일을 유지보호하기 위해 진시황은 북방흉노의 부단한 침입에 대해 적극적인 방어 책략을 세웠다. 대장 몽념을 시켜 흉노를 쳐 하투(河套, 내몽고 鄂爾多斯 Ordos)지역을 탈취하고, 내지의 백성을 그곳에 이주하게 하여 땅을 개간하게 하였다.

 

정문섭 제10-2

 

나중에 몽념에게 서쪽 임조(臨洮, 감숙 서남부)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흉노의 침입을 막으려고 축조했던 구불구불하고 기나긴 만 여리의 장성, 이것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장성은 중국고대 사람들의 지혜와 독창성이 발휘된 상징이 되었다.

진시황은 또 군대를 보내 동남(東南)과 영남(嶺南) 등 지역을 통일하고 그곳의 경제를 개발하고 영거(靈渠, 광서 계림시 부근)를 쌓아 장강수계와 주강(珠江)수계를 연결하여 중원과 영남 간 경제와 문화를 교류하게 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진의 강역이 확대되어 동으로 동해, 서로는 농서(隴西, 감숙 남부), 북으로 장성일대, 남으로 남해에 이르게 되었다. 진 왕조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다민족 봉건국가가 되었고, 또한 당시 세계적인 대국이기도 하였다.

이 과는 진이 나머지 여섯 나라를 쳐 통합하여 최초로 통일된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진시황이 인재 등용을 잘하고 화폐·도량형·문자를 통일시키는 업적을 자랑했다. 다만, 사상의 통제를 위래 금서령을 내리고 유교를 배척하여 분서갱유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북에 장성을 쌓고 남쪽을 개척하여 강역을 넓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민족 봉건국가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정문섭 박사 프로필2

 


<저작권자Ⓒ 시사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