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4년 1월 10일 금요일 오후 7시 15분

고정식박사, 인문학으로 세상을 보다 (1) – 연재를 시작하며

 

요즘 인문학이 뜨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문학이 대학에서 가장 비실용적인 학문으로 홀대받고 있는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문학과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세칭 ‘문사철’(文史哲)이 대학 보다는 사회 현장에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 인류는 너무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왔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비실용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외면 받아 왔던 인문학적 시각과 접근으로 세계를 보고 해석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음은 퍽이나 다행스런 일이다.

이에 본지 주간시사는 ‘인문학으로 세상보기’라는 제목의 글을 오늘부터 열흘 간격으로 연재하려고 한다. 본지는 이 연재를 통해 쉬운 글쓰기의 모델과 함께 사색이 담긴 글을 어떻게 쓰는지 보여줄 것이다.

 필자인 고정식(高正湜, 61) 박사는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모교에서 철학과 윤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편집자 주)

 

 

고정식의 인문학으로 세상보기 배너(최종)

① 정답은 딱 하나다 (?)  

어느 중학교 국어 교사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의 뜻을 간단히 풀이하라고 시험문제를 냈다. 잘 알려져 있는 속담이어서인지 학생들은 표현에 사소한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맞는 답을 썼다. 출제자가 생각한 모범답안, 즉 어떤 일을 하는 데 지도자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쓴 것이다.

그런데 교사를 당황하게 만드는 답안이 하나 나왔다. 한 학생이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낸다.”고 답한 것이다. 이 속담은 흔히 ‘사공이 많을 때의 폐해’를 꼬집을 때 인용된다. 하지만, 이 학생은 이 표현을 흔히 사용되는 맥락을 떠나 마치 처음 대하는 말인 것처럼 살펴보고 해석하였다.

사공이 많다고 하니 그 많은 사공들에게 잠재된 힘을 온전히 결속시킬 수 있다면 배가 정말 산으로 가는 정도에 맞먹는 기적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고 본 것이다. 어쩌면 이 학생은 이 속담의 속뜻을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탐구했고 그 결과 틀에 박힌 뜻풀이를 뛰어넘어 신선한 의미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초등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한 학생에게 물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지?” 그러자 금방 자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거야, 봄이 오지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가 교사가 염두에 둔 정답임은 물론이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이 학생의 대답이 정말 황당한 오답일까? 그렇지 않다. 물이 꽁꽁 언 겨울이 지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봄이 온다! 얼마나 분명한 사실인가. 책이나 학교에서 가르쳐 준 정답을 고지식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틀렸다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건조한 단편적 지식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데 언뜻 생각이 미치고 가슴이 설레는 이 소년의 풍부한 감성이 참으로 부러울 뿐이다. 그러니 냉철한 과학적 시각이 항상 감성적 시각보다 우월하다고 고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에서 예수 탄생을 소재로 한 연극을 했다. 그런 연극의 한 대목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요셉과 마리아가 묵을 곳을 찾는 장면에서다. 초라하고 지친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 역을 맡은 두 아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빈 방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각본에는 이런 대사 다음에 여관 주인 역을 맡은 소년이 “없어요!”라고 매몰차게 대답한 다음 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간단하고 쉬운 단역이었다. 그런데 이 단역을 맡은 소년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정을 담뿍 실은 목소리로 “예, 안으로 들어오세요. 사실은… 방이 있어요.”라고 해버렸다. 애절하게 사정하는 요셉 부부가 너무나 불쌍해 보여서 자신이 연극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엉뚱한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결국 연극의 줄거리가 상당히 달라져 버렸음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 어린 소년은 참으로 황당하고 엉망인 연기를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던 그 자리의 많은 어른들은, 대사와는 전혀 다르지만 소년의 눈물 가득 고인 눈과 순진무구한 행동에 오히려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단역 소년의 인간미 넘치는 감성, 자신이 지금 착실히 연극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분출했던 그 뜨거운 연민의 감정은 참으로 우리의 메말라버린 감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마도 이 소년은 연기자로서는 한심한 수준인지 모르나 인간적 감성으로 말하면 존경스러운 경지가 아닐까. 인간에게는 주어진 명령이나 각본에 충실히 따르는 자세보다 다정다감함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의외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생각 중의 한 가지는, 모든 문제에는 정답, 일종의 모범답안이 있고 그것도 딱 하나만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문제이든 그에 대한 관점 역시 하나밖에 없다고 여기는 고정관념 역시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작용한다. 실제 세상 물정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면을 지니는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혹시 우리는 견고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사람이나 사물, 문제들에 관해 그것이 지닌 다채로운 얼굴이나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2014.1.10

필자   고정식(高正湜)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연세대학교 총무처장 역임, 연세대학교, 한국사이버대학 등에서
<철학과 윤리>, <인간과 문화의 이해>, <현대 사상과 문화> 등 강의.

저서 『웃기는 철학, 우스운 철학』(넥서스북스)
역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나남출판사),
『사실과 허구의 교차로』(천지서관)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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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된 댓글 수 3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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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광홍말하길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헝클어진 세태의 단초가 아닐런지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의 벽을 깨뜨리고 용감하게 세상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것은 우물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오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해답은 교육일진데, 교육은 국가백년지대계라. 교육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꾸준히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실시해 왔더라면 오늘날 처럼 뻣뻣하게 기울어진 고정관념에 얽매인 우물안 개구리는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만세지탄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을 통한 세상보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2. 민선홍말하길

    고정관념을 갖고 하나의 정답만을 찾으려 하는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가정과 학교에서의 일방향적인 교육이 그 주된 이유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관점의 변화를 시도할 때면 익숙지 않은 것이 두렵고 정답이 아닐까 겁부터 나는 게 사실입니다.
    토론 문화의 정착을 통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을,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의견일지라도 합당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견해에는 공감하고 용기있게 박수 보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상산말하길

    나는 지리산을 좋아합니다.
    40년동안 올라 갔다가 내려왔습니다.

    지리산 꼭대기 천왕봉은 딱 하나입니다.
    천왕봉을 오르는 길은 많습니다.

    노고단에서 출발해서 백리길을 며칠동안 걸어 걸어 올라가야만 지리산을 올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리산 계곡에서 놀다 온 사람도 지리산에 올랐다고 합니다.

    학문을 깊이 한사람들은 자기의 길만이 옳다고 합니다.

    데모를 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그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은 웃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