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7년 12월 29일 금요일 오후 3시 39분

고정식 박사, 인문학으로 세상을 보다 (105) 진주인가 돼지인가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성서≫ <마태복음>에 나온다.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전혀 모른다. 누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진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지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돼지에게 진주가 값진 보석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노력 자체가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이다.
 
대체로 이 비유는 어떤 의견을 제시하거나 무엇을 가르치려는 사람에게 상대방의 수준이나 태도를 먼저 파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상대가 경청할 자세가 돼 있는지 우선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의견을 제시하거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게 무망한 상대, 즉 귀하고 심오한 것에 대해 아예 외면하는(마음을 닫아버린) 상대라면 애초에 다가가려고 할 필요조차 없다. 접근 자체가 불필요할 뿐 아니라, 까딱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그림에 대해 아무런 기본 지식조차 없는 사람에게 피카소의 추상화가 왜 창의적, 천재적인지 설명하는 건 괜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진주에 대해 말하려면, 적어도 진주가 보석의 일종이라는 정도는 알고, 그래서 그 가치를 궁금히 여기는 사람과 상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년경 작품)

그런데 이 가르침을 ‘진주를 던져주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돼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비유적 표현이어서 그렇지, 돼지는 원천적으로 진주의 가치 같은 건 모를 수밖에 없도록 태어났다(생겨 먹었다).

내가 혹시 진주를 모르고 밟아버리는 돼지가 아닌지 가정해보자. 만일 나 스스로가 그런 돼지임이 분명하다면 귀하디귀한 진주의 가치를 몰라보고 마치 진흙이나 돌멩이처럼 짓밟기나 해버릴 테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로 우리는 스스로를 진주로 가정할지언정 돼지로 가정해보지는 않는다. 아무리 비유라지만, 가정 자체가 기분 나쁘니까. 자신을 ‘귀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꽉 막힌 존재’로 가정하는 것은 심히 불쾌할 수밖에 없다.  

흔히 남의 조언이나 비판을 ‘경청하라’고 한다. 좋은 약이 입에 쓰듯 타당한 비판이나 건설적 의견은 귀에 거슬리지만 실제로는 좋은 법이니 늘 경청하여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돌파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성군(聖君)이라고 또는 후덕(厚德)했다고 평가되는 지도자들조차 비판이나 충언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음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나 과거의 기록은 지극히 합당한 제안이나 일리 있는 문제점 지적에 대해서도 격한 분노와 공격적 태도로 대응한 사례로 차고도 넘칠 지경이다.

실제 우리 사회에는 창의적 의견, 합당한 발상이 적지 않게 나온다. 우리는 지금 기발함을 넘어 일견 엽기적이기까지 한 온갖 발상이 수시로 출몰하는 정보사회에 살고 있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개인의 문제에서 막중한 국가적 의제까지, 경청하고 채택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건질 만한(현실에 적용해 볼만한) 아이디어들이 꽤 있어 보인다.
 
결국, 문제는 이처럼 다채롭고 만발하는 의견을 경청하지 않는 데 있다. 현대사회는 모든 영역이 고도로 세분화돼 있고 단순해 보이는 문제도 다원적 요소가 난마처럼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들에게서 ‘해박하다’ ‘전문적 식견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조차 그 지식과 전문성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진주를 몰라보고 밟아버리는 돼지’라고 속단하기보다 혹시 나 자신이 그런 돼지가 아닌지 짐짓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장하는 개인, 훌륭한 지도자의 필수 요소로 ‘경청하는 자세’를 꼽는 데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국가의 장기정책 입안이나 고난도 의제의 대안 수립처럼 막중한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고정식배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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