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8년 4월 19일 목요일 오전 10시 21분

고정식 박사, 인문학으로 세상을 보다 (111) 블라인드 테스트의 깊은 뜻

 

판정이나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운동경기의 심판, 재판관, 심사위원이나 교사, 교수 등이 좋은 예다.

판정이나 평가가 모호할 수 있는 경우도 분야에 상관없이 자주 발생한다. 한 예로서 야구경기 심판을 생각해보자. 투수가 공을 던지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즉시 판정, 선언해야 한다. 스트라이크냐 볼이냐 판정하는 기준은 경기규칙으로 명시돼 있다. 공이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을 통과했는지 벗어났는지가 기준이다. 공이 분명히 그 범위로 들어오거나 완전히 벗어나면 판정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공이 들어온 범위가 스트라이크 존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다. 이때 심판이 엄격한 심판인지 너그러운 심판인지가 가려진다. 엄격한 심판은 그 범위에서 작게 벗어나더라도 ‘볼’을 선언하지만 너그러운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한다. 그러다 보니 심판에 따라 판정이 다를 수 있는 경우도 제법 생겨난다.

선수나 감독은 경기에 임할 때 심판이 엄격한 사람인지 너그러운 사람인지에 꽤 신경을 쓴다. 하지만 심판이 엄격하든 너그럽든 그에게 복종한다. 왜 그런가? 심판이 공정하게 판정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엄격한 심판이든 관대한 심판이든 간에 그 엄격성이나 관대함을 특정 선수나 팀이 아니라 어느 선수 어느 팀에게든 똑같이 적용하므로, 판정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수나 팀에 상관없이 똑같은 잣대로 판정하는 이상 그 심판은 공정한 심판이 된다. 편파적인 심판이 아니니까. 거꾸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설령 심판이 상당히 정확, 엄격하게 심판을 보더라도 특정 선수나 팀에게만 그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고 일부의 다른 선수나 팀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면 편파적인 불공정한 심판이 되고 만다.

스위스 베른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스위스 베른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정의의 여신상은 손에 저울을 들고 눈은 천으로 질끈 동여맨 모습인 경우가 많다. 이른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고 있다.

여신이 든 저울은 공평무사를 상징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눈을 가린 모습은 의아해 보이기도 한다. 눈 부릅뜨고 살펴도 잘못 볼 수 있는데 눈을 가리고 판단해야 한다는 요구가 의아한 것이다. 정의의 여신은 곧 법의 여신인데, 죄의 유무와 경중을 명확히 판단해야 하는 주체가 눈을 가리고 있어야 한다니….

그 상징성은 실로 단순명쾌하다. 판단,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 자체에만 주목하고 그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눈 딱 감으라는 것이다. 똑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히 똑같은 평가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동일한 행동인데도 A가 했으니 유죄로 판결하고 B가 했으니 무죄라고 판결한다면 그건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부당한 재판이 된다.

이런 주장은 공정한 성적평가를 위해 채점 교수가 시험답안 작성 학생의 이름을 가리고(모르는 상태로) 오직 작성된 답안만으로써 채점해야 하는 것과 같다. 경쟁하는 여러 상품을 비교, 평가할 때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를 실시하는 발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공정하게 평가하려면 동일한 잣대(척도)를 사용하라”고 압축, 표현할 수 있는 사상이다. 

어떤 경우든 이중 잣대는 편파적인 것, 불공정한 것, 옳지 않은 것이다. ‘편파적’이란 수식어가 붙은 심판, 재판, 평가는 아예 심판, 재판, 평가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지 않겠는가. 요즘 정부 요직 인사(후보자)들의 도덕성이나 능력의 평가와 관련하여 ‘내로남불’격이라고 비난받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미 널리 쓰이고 있지만,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을 뜻한다.

이런 ‘내로남불’식 접근은 다소 문제가 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불의(不義)한 것이다.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못된 짓거리다. 최근 이런 행태를 합리화하기 위해 대통령 측근의 인사들까지 억설(臆說)과 다름없는 주장을 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탄과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 때가 많다.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 특히 정치인들과 행정부 및 사법부의 중추적 인사들은 블라인드 테스트의 속뜻을, 정의의 여신상의 ‘무지의 베일’이 상징하는 바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판단과 평가에 이중 잣대를 동원하는 순간 부정의로 직행하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고정식배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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