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8년 12월 13일 목요일 오전 11시 19분

[정문섭 박사] <사기열전>에 나오는 고사성어39 – 중취독성(衆醉獨醒)

나만 깨어 있어봤자

중취독성(衆醉獨醒, zhòng zuì dú xǐng)

무리 중, 술 취할 취, 홀로 독, 깰 성

《사기》 굴원·가생(屈原·賈生)열전에 나온다.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H는 내가 아는 변호사 중 한명이다. 어린 시절 수재로 소문난 그는 시골의 고등학교를 나와 S대 법대 4학년 재학 시 사시와 행시에 합격하여 검사가 되었다. 부장검사가 된 후 몇 년,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내 꿈은 말이야. 법조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고향의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다 연수(年數)를 채워 부장검사가 되긴 했지만, 그간 남쪽 한적한 지청(支廳) 등에서 ‘붙박이’가 되다 보니 비로소 내 미래가 보이더라고. ‘다른 동기에 비해 지연·학연·혼연(婚緣)·정연(政緣)이 없어 결국 서울에서 먼 지역으로만 떠돌아다니는 월급쟁이 평검사로 남게 될 것이고, 나중에 동기들이 차장검사나 검사장에 오르면 후배들을 위해서 용퇴를 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그리 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실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자네를 따를 자가 없고 ‘소신과 올바른 검사’하면 바로 자네인데…. 이리 빨리 나가서야 되겠는가?“

“뭘 그리 추켜세우나. 이제야 예전에 자네가 들려준 중국 굴원과 관련된 그 성어가 생각나는군. ‘다른 사람은 취했더라도 나는 깨어있는 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그 성어.”

“중취독성! 굴원이 자신의 억울함과 분함을 《이소(離騷)》 등을 통해 토해냈지. 자네도 이참에 ‘검찰개혁’을 위해 글을 한 번 써보지 그래.”

며칠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랫동안 대검을 출입했던 모 기자가 나라의 권력자체가 되어버린 검찰조직의 모순과 정치검사들의 행태, 그리고 나같이 억울한 일들을 모아 집필중이더군. 난 익명(匿名)의 ‘제보자’가 되기로 하였다네.“

중국 전국시대 후반, 굴원은 초 왕족의 한 사람으로 회(懷)왕의 좌도(左道, 보좌관)가 되어 내정과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삼려대부(三閭大夫, 세 귀족 집안을 다스리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 등 정적들이 굴원을 시기하여 중상하므로 왕이 멀리하였다. 굴원은 자기의 원통함을 시 《이소》를 통해 토로하였다.

그 후로도 굴원이 진에 대항하기 위해 제와 합종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이 회왕을 초청하였을 때 반대하였으나 왕은 막내아들 자란(子蘭)의 권유에 따라 진을 방문했다가 억류당해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경양왕(頃襄王)이 자란을 영윤(令尹,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굴원이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 ’자란’이라고 비난하였다가 또 다시 자란 일당의 모함을 받아 강남으로 유배되었다.

어느 날 굴원이 유배지를 떠돌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강가에 이르렀다. 한 어부가 지나가다가 물었다.

“당신은 혹시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어찌하여 이런 곳에 오셨습니까?”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혼자만 깨끗하고, 뭇 사람이 모두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깨어 있었기 때문에 쫓겨났다오(중취독성).”

“성인(聖人)이란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시세를 따라 잘 처세한다고 하던가요. 세상이 모두 혼탁해 있으면 어찌하여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다면 어찌하여 그 지게미를 먹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추방을 자초하셨습니까?”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冠)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의복의 먼지를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때와 먼지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몸을 장강(長江)에 던져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는 편이 나을 것이오. 또 어찌하여 희고 흰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참아내겠소.” — 《어부사(漁夫辭)》

말을 마친 굴원이 《회사(懷沙)》라는 부(賦, 한문체 운문의 일종)를 지어 읊었다. 얼마 후, 그는 돌덩이를 끌어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데 홀로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불의와 부정이 만연한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덕성을 지키려는 자세 또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사실 ‘나만 깨어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참 고독하고 외로운 일이다. 돌이켜 보건대, 필자도 대의명분이나 자존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읊으며 ‘취해 있는 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그들과 같이 흘러가 버렸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굴원처럼 그리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범인(犯人)에 불과했기 때문이리라.

후세사람들이 그가 죽은 음력 5월 5일을 단오절이라는 명절로 만들어 그의 충성과 애국을 기려 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굴원의 분함과 억울함을 동정하면서도 그가 적극적으로 간신을 물리치고 왕을 설득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해 결과적으로 조국인 초가 망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내리며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중국 현대사에서도 보면, 문화대혁명기간(1965-1976) 류사오치(劉少奇)는 소신을 갖고 마오쩌둥(毛澤東)에 반기를 들었다. 비록 그가 ‘명분’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마오를 이길 힘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니 그의 주장은 감옥 속에서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렸을 뿐, 결국 감옥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러면 덩샤오핑(鄧小平)은 어찌했는가? 그는 하방(下方)하여 소신을 숨기고 은인자중하였다. 문화대혁명의 끝이 오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마오에게 거짓으로 ‘충성맹세’를 하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도움을 받아 중앙무대로 올라왔다. 보이지 않게 세력을 모아 두었다가 1976년 마오가 죽자 전격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종식시키고, 1978년 마침내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오늘의 중국이 있게 만들었다. 먼 훗날 100여년이 지나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모르지만, 지금 사람들은 비록 한때 소신을 굽히긴 했지만 부도옹(不倒翁)이 되어 경제를 살려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준 덩을 더 추앙하고 숭배하고 있다.

정문섭 박사 프로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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