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9년 1월 18일 금요일 오후 12시 36분

[정문섭 박사] <사기열전>에 나오는 고사성어40 – 기화가거(奇貨可居)

 

기화가거(奇貨可居, qí huò kě jū기이할 기, 재물 화, 옳을 가, 있을 거

《사기》 여불위(呂不韋)열전에 나온다. 진기한 물건을 쌓아 둘 만하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2010, GDP)’, ‘1인당 국민총소득(GNI) 200불(1978) → 9,633(2018, IMF)’ — 중국 덩샤오핑이 1978년 말 ‘개혁개방’을 실행한 후 40년이 지난 중국경제의 현재 모습이며 성취다.

이러한 경제 및 사회의 발전은 어디에서 온 걸까?

바로 사람들 즉,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덩샤오핑이 가장 고민하고 걱정하였던 것은 이를 이끌어갈 인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1965-1976)기간 한창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젊은이들이 홍위병으로 나가거나 벽지 농촌으로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둘러 학교를 세우고 소학교 학력밖에 없는 청년들이지만 대학으로 입학시키고 좀 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박사 공부를 하게 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지금의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국무원 총리 등이다.

덩샤오핑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재추천을 받는 한편,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인재발굴에 나섰다. 동시에 자기를 비롯한 원로들의 동반퇴진을 적극 실행하여 그 자리에 그간 발굴해 온 젊은이들로 채웠다. 이들을 개혁개방의 기수로 삼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오늘의 중국경제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기화가거’하여 능력 있는 인재들을 찾은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거둔 것이다.

여불위는 전국시대 말 대표적인 거상(巨商)으로 여러 곳을 왕래하며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천금의 돈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 즈음 진에서는 소왕(昭王)의 태자가 죽고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이 그 자리를 이었다. 안국군에게는 많은 처첩이 있었는데 그 중에 화양부인(華陽夫人)을 가장 총애하여 그녀를 정부인으로 삼았다. 20명의 아들 중 둘째 아들인 자초(子楚)의 어머니인 하희(夏姬)가 안국군의 총애를 잃어 자초는 조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자초는 조에서 냉대를 받았으며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인질신분인 관계로 생활 또한 곤궁했다.

어느 날, 여불위가 장사하러 조의 수도 한단(邯鄲)에 갔다가 자초를 보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뜻하지 않은 보물이로군. 사 두는 것이 좋겠군.”

여불위는 자초를 찾아가 말했다. “나는 그대의 문호를 성대히 해드릴 생각입니다.”

자초가 웃으며 말했다.

“먼저 그대의 문호를 성대하게 만든 후에 내 문호를 크게 해 주시오.”

“그대는 모르고 계십니다. 저의 문호는 그대의 문호가 성대하게 되어야 비로소 제 문호도 성대하게 될 것입니다.”

자초가 그 말의 뜻을 깨닫고 안으로 불러들여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말했다.

“그대의 할아버지 소왕은 나이가 많습니다. 게다가 뒤를 이을 태자 안국군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대를 부인의 양자로 만들어 세자로 세우려 합니다.“

이 계획을 들은 자초는 이 일이 성공할 경우 여불위와 더불어 진나라를 나누어 가지겠다고 약속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500금을 주어 빈객들과의 교제비용으로 쓰도록 하고, 자신도 500금으로 진기한 노리개 등을 사들고 진에 들어갔다.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나 가져온 물건을 모두 부인에게 바쳐 환심을 산 후, 기회를 보아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게 했다.

“자초는 어질고 지혜가 있으며, 널리 천하 제후의 빈객들과 교제를 맺고 있습니다. 또한 언제나 부인을 마음속의 하늘로 우러른다는 말을 하며, 태자와 부인을 흠모하여 눈물을 흘린답니다.”

“용모가 잘나서 쓰인 사람은 용모가 늙으면 총애도 시들해진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태자를 모시어 매우 총애를 받지만 아들이 없습니다. 어째서 지금 여러 공자들 중에서 현명한 자와 인연을 맺어 후사로 이을 양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남편이 세상에 있으면 그대로 존경을 받지만, 남편이 죽은 후면 양자가 왕이 되어야만 세력을 잃지 않습니다.”

부인은 언니의 충고에 따라 태자 안국군을 붙잡고 설득하였다.

“제가 대왕의 총애를 받아 정부인이 된 하였지만 불행히도 아들이 없습니다. 자초를 저의 아들로 삼아서 후사를 잇게 해주십시오.”

안국군이 자초를 후사로 삼기로 약속하고 자초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고 여불위에게는 자초를 돌보도록 청하였다. 자초는 마침내 인질의 신분에서 일거에 세자가 되었고, 제후들 사이에서 차차 명성이 높아졌다.

여불위는 당시 한단의 한 미인 조희(趙姬)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자초가 이 여인에 반해 부인으로 삼고자 하였다. 여불위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큰 이익을 위해 이 여인을 바쳤다. 이 여인이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가졌으나 숨기고 사내아이를 낳아 정(政)이라 이름 지었다. 훗날의 진시황이다.

얼마 후 진이 조를 공격하자 조는 자초를 죽이려 했다. 여불위가 600금의 거액으로 감시하는 관리를 매수하여 자초를 무사히 진으로 귀국시켰다. 여불위가 자초에게 초나라 의복을 입게 하여 화양부인을 알현하도록 하니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던 부인이 아주 흡족해했다.

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무려 53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는데, 바로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은 화양부인을 황후로 하고, 자초를 태자로 봉했다. 조는 자초의 부인과 아들을 정중히 진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자초가 왕이 되었다. 이이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에 앉혀 문신후(文信侯)로 봉하고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장양왕이 즉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BC247년, 정의 나이 13세 때였다. 정은 여불위를 존경하여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 불렀다. 여불위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장사꾼에서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성어를 진기한 물건은 잘 간직하여 나중에 이익을 남기고 판다. 나중에 높은 값에 팔기 위해 진기한 물건을 사서 쌓아 둔다는 뜻으로 썼다. 그리고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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