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4년 2월 10일 월요일 오후 5시 58분

김정일 생모「김정숙 배역 」의 전 북한 공훈 여배우 – 주순영씨 단독 인터뷰(1)

 

      박승민 기자 (park83@sisareport.com)

 

“독재자의 통치하에서 주민들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죠. 빨리 통일돼야죠

  

주순영 공훈배우 -김정숙

 

북한에서 16살부터 18년간 ‘김정숙(김정일의 생모) 역할’의 여배우 생활을 한 주순영씨는 “북한주민들이 아직도 김정은 한 사람한테 속아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고 말했다.

주씨는 북한 최고의 예술인 칭호인 공훈배우 출신이다. 그녀는 2003년 한국에 입국했다. 주순영씨는 서울에서 대형 라이브음식점을 운영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경험도 했다. 그녀는 자본주의 경영이 서툴러 종업원을 많이 고용하는 바람에 힘들어서 그만 정리하고, 지금은 신학대학을 마치고 곧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했다.

주씨는 “내가 여기(한국) 온지도 10년인데, 아직도 북한은 변화된 게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계속 독재자의 통치하에서 (주민들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죠. 빨리 통일돼야죠” 라고 했다.

그녀는 ‘김정숙 역할’을 겸해, 김일성 前 주석이 참석하는 모든 연회 등의 행사에 빠짐없이 사회를 봤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주씨는 기자의 질문에 거침이 없었다.

주순영씨는 장성택 처형 건에 대해, “(관련 소문처럼) 이설주가 김정은과 결혼 전에 장성택과 남녀관계가 충분히 있었을 수 있다. 북한은 시스템 자체가 그런 사회이기 때문이라며, 은하수관현악단과 기쁨조에 대한 얘기, 북한 고위 간부들과 악단의 배우들과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밝혔다.

그녀는 ‘고난의 행군’이 이어진 2000년에 미인계를 이용한 중국인 재력가의 투자를 유치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에 건너가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한국인 교회를 방문한 게 당에 그대로 보고됐고, 북한에 귀국하려다 북중 국경의 훈춘에서 체포 일보 직전에 탈출에 성공했다.  주씨는 곧바로 중국에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바꾸는 성형 수술을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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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포트는 최근 주순영씨와 2회에 걸쳐 4시간 동안 심층 인터뷰한 취재 내용을 3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주)

저의 고향은 함경북도 길주입니다. 저는 고등중학교(중고등학교 과정) 4학년 때인 1974년 3월에 호위사령부(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김 일족의 신변경호부대)에 의해 선발되었습니다. 졸업하기 1년 전이었지요. 제가 선발되었을 때는 내가 왜 뽑혔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평양으로 올라갈 때도 어디로 간다고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배낭 속에 노트 하나, 세면 도구 하나, 베개 빵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베개 빵 하나가 한끼 식사에 해당하니까, 평양까지 가는 줄 알았습니다. 베개 빵이 두 개면 좀 더 먼 곳으로 가고, 빵이 세 개면 전방(남북 군사분계선, 휴전선 부근)으로 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전국에서 뽑힌 53명 중 세 명이 선발되어 평양에 올라갔습니다. 평양에 도착해서 호위사령부로 바로 갔습니다. 우리는 평양에 올라갈 때 군복을 입고 갔어요. 호위사령부에서 세 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한 명을 다시 뽑았습니다. 저는 키가 작아 제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합격했어요. 두 명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어느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가자, 배가 나온 한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전문섭 호위사령관이었습니다. 그가 저를 보자마자, 분장해 놓으면 ‘김정숙 동지’와 똑같겠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김정숙 동지가 도대체 누구인가? 김정숙 동지라면, “존경하는 항일의 첫 여성 영웅이시며…” 이런 수식어가 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의 부인인 김정숙 동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자, “동무는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수령님께 가장 충직한, 항일의 첫 여성 영웅, 김정숙 동지의 배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저는 무서웠어요. “이것을(이 역할을)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죽이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며 무서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겁이 났어요. 이렇게 호위사령부 안에서 배우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훈련은 처음에는 세뇌학습을 시켰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군사까지 학습을 시켰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정치대학, 영화연극대학, 음악무용대학, 김일성군사대학의 5개 대학의 특별교수진이 저 한 명을 교육시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교육은 정치사상 학습을 시키고, 김정숙의 혁명활동을 달달 외우도록 통달시켰습니다. 김정숙이 어떻게 어떻게 항일무장 투쟁을 했다는 것, 그것을 통달해야만 제가 작품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군사훈련도 했어요. 총도 쏘아야 되고, (완전)무장 강행군까지 다했습니다. 어쨌든 한달 동안은 신병훈련처럼 받았어요. 6개월동안은 계속 교육받고 암송하고, 벽에 걸려있는 김정숙 동지가 활동했던 도록(기록) 해설을 모두 외워야 했습니다. 저는 김정숙이가 되어야만 하잖아요? 나한테는 김정숙의 메시지만 나와야 되는 거예요. 항일무장투쟁의 김정숙의 모습을 재현해야 했기 때문이죠. 저에 대한 연기지도는 영화연극대학교수가 맡았습니다.

제가 외우는 것은 자신 있었어요. 교육의 진도가 빨리 나갔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되자 1호 행사 공연, 즉 김일성 주석 앞에서 공연한다고 했습니다. 김일성 앞에서 선을 보이는 공연이었지요. 김일성에게 이런 배우를 뽑았다고 그냥 소개(인사)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대공연에서 제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그 공연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에게 “정숙 동무가 살아 돌아 온 것만 같습니다” 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김일성의) 옆에서 “조선 여성의 본보기가 되세요” 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김정일에게도 (제가) 자기 엄마처럼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주위에 간부들이 있을 때 그렇게 말했습니다. 1974년도 일입니다. 저는 (김일성 주석 앞에서) 선보이는 공연에서 합격된 겁니다.

분장은 특수분장을 시킵니다. (제가) 김정숙과 비슷하다고 데려다 놓고 5시간~7시간씩 특수분장을 시켜요. 그러니까 김정숙이란 인물을 최고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 때 분장사는 1호 분장사였어요. 1호 분장사는, 김일성 얼굴 만지고(화장하고) 김정숙의 얼굴 분장시키는 사람, 김일성 아버지 어머니 역할 배우들만 분장시키는 사람입니다. 1호 분장사는 여자 1명 남자 1명이 있었어요. 1호 분장사들은 모두 독일에서 연수 받고 온 사람들이었어요.

1호 분장사가 제 얼굴을 보고, “참 그림 그리기 좋은 얼굴” 이라고 했어요. 아무렇게나 해도 그림이(분장할 얼굴이) 잘 됐는가 봐요. 제가 비슷하다고 데려다(뽑아) 놓고 오랫동안 분장하면 저는 졸고 있다가 눈을 뜨면, 저의 (원래의) 얼굴이 없어지죠.

첫 공연이 끝난 후, “고난의 행군”, “대부대 선회작전”, “두만강변에서의 한 해의 여름”의 1, 2, 3부작을 또 1년간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 다시 김일성 앞에서 세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제가 맡았던 작품이 나오기 전에는 김정숙의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한 작품이 없었어요.

그 이전에는 한 여자공작원이라거나, ‘남숙 동지’라고 다른 이름으로 썼습니다. 제가 그 역할을 하면서 (본명인) 김정숙으로 바뀌었어요. 그전에 남숙 동지 배역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노래는 잘 했는데, 연기가 안 되고 얼굴이 아니었지요.

그때 중요한 것은 호위사령부에 대해 김정일이 손대기 전에는 김평일(김일성의 2번째 부인 김성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래서 호위사령부를 복잡하게 만들어 놨어요. (그는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 배역을 맡아서인지, 김정일의 계모인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에 대해서는 평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호위사령부에서 김평일이 밀려나고 김정일이 들어섰습니다. 이 세 작품은 김정일을 (김일성의)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김정숙을 들어내야 김정일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죠. 그 무렵 김정일과 김평일의 후계구도문제로, 김정일 지지 세력과 김성애 세력이 대립하던 시기였어요.

우리 작품은 기본이 무대공연이었습니다. 영화작품이 아니었어요. 한국으로(서방세계로) 말하면 뮤지컬이지요. 김정숙의 실제인물을 최초로 만들어 낸(드러낸) 곳이 호위사령부였습니다. 첫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도 1편 찍었어요. 제목은 “태양은 빛나리” 입니다. 이 영화는 김정일의 어린 시절이 나온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간부들과 시사회를 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이 나오니까 쑥스러워서 그랬는지 “인민들한테는 보여주지 마세요” 라고 말해서,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어요.

4월15일 김일성 생일을 기념해, 세계 여러 나라의 예술인들이 모여 봄 축전이 열렸습니다. 김일성 앞에서 공연할 때 저는 ‘김일성 팀’ 의 사회를 맡았어요. ‘고난의 행군’ 을 비롯해 세 작품은 3년 정도 공연했을 겁니다. 모두 군복을 입고 공연했어요. 지하공작을 나가는 장면은 치마저고리를 입는 모습이 나옵니다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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