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 2014년 3월 09일 일요일 오후 11시 04분

김정일 생모「김정숙 배역」의 전 북한 공훈 여배우, 주순영씨 인터뷰(2)

 

    박승민 기자(park83@sisareport.com)

 

(前回에 이어)

이설주(김정은 처)는 청년협주단에 있다가 한국에도 왔다 간 적이 있잖아요. 이미 이설주는 금성고등중학교에서부터 키워진 애에요. 저는 이설주가 대단한 훈련(교육)을 받고 은하수관현악단으로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북한 사람들이(탈북자들이 언론매체에서)인터뷰 하는 것 보면, 이설주가 사로청(現,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그 과정을 거친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는 이 얘는 13세부터 금성고등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살부터 은하수관현악단에 들어온 거예요. 16세부터 20 몇 살까지 악단에서 활동하다 퍼스트레이디(김정은 부인)가 된 것이지요.

이설주는 청진이 고향이라고 들었습니다. 금성고등중학교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안에 있습니다. 우리 때는 기쁨조를 16세에 졸업할 때에 데려갔는데, 지금은 어릴 때부터 데려갑니다. 그래서 13세부터 훈련 받는 겁니다.

 

주순영 공훈배우 -김정숙

 

장성택이 중앙 사로청의 최고책임자(위원장)였는데, 학생 청년을 관할합니다. 금성고등중학교도 그 관리하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 사로청의 위원장은 예능교육을 받고 있는 금성고등중학교 등의 여자애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연회 할 때는 공연팀이 꼭 따릅니다. 공연이 끝나면 같은 장소에서 파티가 있는데, 그때 공연했던 여자들이 간부들 옆에 한 명씩 앉아서 기쁨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봄 축전행사가 끝나면(김일성 연회장은 연회가 끝나면) 분위기가 파티 분위기로 가는 것이지요.

북한 봄 축전이 1982년에 시작되었는데, 저는 봄 축전 첫 행사부터 참가해서 공연의 사회를 맡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김일성행사를 하는 공연팀이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 참가한 공연팀은 검증이 돼야 합니다. (저는) 성분(사상)과 기량 사회 실력이 검증이 되었으니까, 김일성 행사에 사회를 응당(당연히) 보는 것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모두 외국인 손님들과 함께 연회를 합니다. 공연이 끝나면 파티가 이루어지고, 여자애들이 간부 옆에 앉아서 함께 술을 마셔야 합니다. 애들이 술을 마시고 취하면 간부들이 애들을 안내해서 어디론가 데리고 가요. 그때는 몰랐어요. 애들이 취했으니까 (좀 쉬게 하려고) 저렇게 데리고 가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일성시대에는 김일성이 인민들을 위한 일을 더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김정일은 더 놀자판을 벌리고 더 방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쁨조 소문이 더 많이 났겠죠.

김일성은 원래 몰랐는데, 김정일이 자신이 놀려고 하니까, 악단을 만들어서 아버지한테 준 것 같아요. 김일성이 보천보전자악단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우리 호위사령부의 협주단이 맨 처음 외국 손님들을 맞이 했습니다. 호위사령부 협주단이 최초의 기쁨조 공연팀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 다음이 만수대예술단이에요. 그 다음에 보천보전자악단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정권을 잡으면서 김일성에게 보천보전자악단을 선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왕제산경음악단은 자신의 기쁨조였죠. 자신이 즐기고 싶으니까, 아버지에게도 만들어 준 것이죠.

악단에서 공연팀은 16세부터 23세까지입니다. 이 나이를 넘으면 제대시켜서 동평양대극장으로 넘겨서 일반 공연팀이 되는 것 입니다. 평양시에서 공연이 끝나면, 공연팀을 각 도(지방)까지 보냅니다. 그러면서 그 공연에 대해, “김정일장군님의 배려로 수령님께 드린 악단조차도 (김일성)수령님은 인민들에게 돌리시는 어버이(김일성) 수령님” 이라고 이렇게 선전하고 다녔습니다.

 

주순영 옛날사진 최종 1389177582511

 

주순영씨는 김정일과의 남녀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여배우 우인희의 불륜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하 주순영씨의 증언을 포함해, 우인희의 사건에 대해 간략히 정리한다.

우인희가 처형될 때의 소속은 ‘415영화촬영소’였습니다. 그 때 저는 20 몇 살 때인데, 배우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예술인들과 관계자들 3천명이 우인희 공개처형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우인희는 1960~70년대 당대 절세미인으로 북한 최고의 여배우였다. 우인희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백조와 같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목란꽃’ ‘한자위단원의 운명’ ‘세동서’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여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또한 타고난 배우였다. 그는 영화 촬영 시 거의 두 번 반복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연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영화인들은 우인희를 인정했다.

그런 우인희가 1980년에 김정일의 특별 지시에 의해 총살을 당하게 된 것은 돈 많은 재일 교포 청년 주정기의 승용차 안에서 그와 정사를 가진 후 숨진 사건이 발단이 됐다.

우인희는 재일교포 청년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80년 겨울 어느 날 두 사람은 주정기의 고급 승용차 안에서 히터를 켜놓고 사랑을 나눈 뒤 잠들어버렸다. 결국 청년은 질식사한 채로 발견됐고, 우인희는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가 2주 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주정기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를 하던 모범생이었다. 그런 주정기가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그의 부친이 사업에 크게 성공해 김일성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주정기의 부친은 조선중앙방송에 첨단 일본제 설비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어 당시 북한에서 주목하던 해외 상공인이었다.

이 사건은 즉각 김정일에게 보고되었다. 김정일은 죽은 주정기의 부친이 공화국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이 사건을 단순한 불륜사건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우인희를 살려낸 후 심문을 시작했는데 우인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등 심하게 반발했다.

우인희는 조사를 받으며 계속 자신이 조사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김정일에게 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우인희는 한때 자신과 관계를 가졌던 김정일에게 SOS를 보냈던 것이다.

그녀가 불륜관계였던 남자들에 대한 추궁 과정에서 거명된 이름에는 장군님(김정일)의 이름도 포함되어서 더 충격적이었다. 때문에 당시로선 우인희를 놔두었다가는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영화촬영소와 배우들에게 집합명령이 떨어진다. 버스를 타고 교외의 한 장소로 나간 배우와 영화관계자들은 “우인희는 부화방탕(불륜)죄를 범했으므로 인민의 이름으로 총살형에 처한다”는 방송을 들었다. 처형 장소에 나온 사람들은 왜 우인희가 처형되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딸과 남편이 보는 앞에서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소속의 AK 소총을 든 사형집행자들이 나오고, 우인희를 향해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 끔직한 광경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그 처절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우인희는 명성 있는 연출가이며 체코 유학파 인기 영화감독인 류호선과 결혼해 3명의 아이까지 두게 된다. 우인희가 처형될 당시 그의 남편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우인희의 바람기에 견디다 못해 이혼신청을 했지만 당에서 허락하지 않아 같이 살았는데 결국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실력을 인정해 김정일이 특별히 사면해 다시 평양으로 올라와 영화계에서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우인희의 처형소식은 북한 전역에 전해졌고 인민들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인희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는 주인공이 교체된 채 다시 만들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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